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제5 – 동천/중천/서천/봉상/미천왕

『삼국사기』를 끝까지 읽어보다

중국 대륙에서는 서기 220년에 조조 사망 이후 아들 조 히메가 헌제을 폐위하고 후한을 멸망시키는 낙양을 수도로 위(위)를 건국하자, 221년 유비가 서쪽에서 청두를 수도로 삼은 손권이 남쪽에서 떠오르는 건국했고, 우리가 잘 아는 삼국 시대의 막이 올랐다.228년 공손연이 요동에서 자립했지만 238년 위, 사마의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제11대 히가시 텡노 서기 227년 히가시 텡노[동양이라고도 불린다]는 이름이 우위이다.(동천 왕[혹운]휘우 정도 있다)어릴 적 이름은 교대로, 산상왕의 아들이다.소인( 명교彘산상 왕 유키코)히가시 텡노의 어머니는 주 미침란 사람과 하고 궁으로 들어와서 산상왕의 든 코오가 됐지만 그녀의 출신 부족이나 성은 알려지지 않았다.(어머니·주통 산상 초 황후)선왕인 산상왕 17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산상왕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전왕 십칠 자지 이것 사위)히가시 텡노는 인품이 관대하시는 인자.(왕성 관인)왕후가 왕의 심성을 시험하기 위해서 왕이 나가서 놀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사람에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끊게 했다.(왕후 욕심 시험 왕 심후 인절)왕이 돌아와서 말하고서는(왕 환왈)”말이 갈기가 없으니까 불쌍하구나”(마 무렵 가련하다)이라고 말했다.또 시종을 시켜서 식사할 때 일부러 왕의 옷에 국을 쏟도록 했지만 역시 화가 나지 않았다.(또 영 시자진 식사양복 갱어 왕의또한 불량 노여움)

시호(히): 숨기고 피한 의미에서 흔히 사용되지만, 여기에서는< 위대한 사람들의 생전의 이름>의 의미/계절(후):기후,<주의 깊게 본다>/절(마디): 자르다./갈기(사냥,사냥):갈기/양(양):?/갱(갱):국체에(히가시 텡노)가 어릴 때 그 심성을 시도한<왕후>은 아마<왕후 우 씨>이다.우 씨 왕후는 교체의 어머니(주 미침라 이후 여자)이 교체를 임신한 때부터 이를 질투하고 죽이려고 했지만 교체가 태어난 후도 여러가지 방법으로 심술을 한 것이다.

서기 228년(히가시 텡노)2년 봄 2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사면을 실시했다.(두월 왕여 졸업 본사 시조 묘대사)(히가시 텡노 2년)3월 우 씨를 왕 태후에 봉한.(세월 봉우 씨 때문 왕 태후)

왕 태후는 전왕(여기에서는 산상왕)의 정실 배우자를 의미한다.우 씨는 선왕인 산상왕이 첫번째 아내이니 마땅히 왕 태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봉함했다햄은 왜일까?우 씨가 산상왕의 첫째 부인이지만, 그녀를 둘러싼 복잡한 사정 때문에 정식 왕후의 지위를 인정할 것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

서기 230년(히가시 텡노)4년 가을 7월 국가 서로 고루가 죽으면 우 야스아키림 시중을 들새 국가상으로 임명했다.(네년 가을 칠월 국가 장관·메이지 23년(히가시 텡노)8년 위나라가 사신을 보내고 화친을 맺었다.(팔년 위 견사 화친)

위, 촉, 오-삼국지 시대의 그 위의 나라이다.220년에 조조가 사망한 뒤 그 아들 조 히메가 후한을 멸망시키는 위(조 위)을 건국 221년 유비가 촉, 222년에 손권이 오를 건국했다.유비는 223년 작고했고, 손권은 252년까지 지냈다고 한다.히가시 텡노 원년인 234년은 촉의 제갈 공명이 다섯 저장원에서 죽은 바로 그 해 것이다.조조와 유비는 이미 죽고 손권은 아직 살던 시기이다.

(히가시 텡노 8년)가을 9월, 태후 우모 씨(위 씨)이 숨졌다.(가을 구월대 후우)태후가 임종에 이르고 유언했다.(대후 임종 유언 일)”내가 도의에 반하는 행동을 했으니 장래 저승에 가서 무슨 낯으로 국가들에 만날까요?첩실 만일 많은 신하가(내 시체를)틈이나 구멍에 팽개칠 수 있다 없다고 생각하니, 나를 산상왕 곁에 묻는 것을 부탁합니다”(약군 시노 바즈 제어 구학칙청장 아어 야마가미 왕릉)신하들이 태후의 유지대로 산상왕의 무덤 옆에 태후를 묻어 묻었다.(수장 지여 그 말)신관이 말했다.(무자 일)”기쿠요 왕이 나한테 내려오고 말하고서는(국가 양강 어여일)”어제 우 씨가 산상왕에 돌아가는 것을 보고 속상하고 화나는 일에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그와 싸웠다.(작견 위 씨 귀우 강 상부 마사루 분에수 여지전) 돌아와서 생각하고 보면 부끄러워서 너무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다.퇴이 생각”당신이 조정에 알리고 적당한 것으로 나를 숨기도록 해라”(너 고어 아침 차아 이물)라고 하셨죠.”이에 능 앞에 소나무를 7겹으로 심었다.(이것용 우에마츠 나나에 어릉 앞)

(동천왕 8년) 가을 9월 태후 우씨(于氏)가 죽었다. (추구월대후 우)태후가 임종에 이르러 유언하였다. (대후 임종 유언일) 제가 도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으니 장차 저승에 가서 무슨 면목으로 나라님을 뵙겠습니까? 첩실도 많은 신하들이 (내 시신을) 도랑이나 구덩이에 내던질 수 없다고 생각하면 나를 산상왕 곁에 묻어줄 것을 부탁합니다.(약羣신불인擠어구壑 칙청장아어산상왕릉) 신하들이 태후의 유지대로 산상왕의 무덤 옆에 태후를 묻어 장사지냈다. (遂葬之如其言) 신관이 말했다. (무자왈) ‘국양왕이 내게 내려와 말하기를, (나라의 양강어요일)’ 어제 우씨가 산상왕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분하고 화가 나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그와 싸웠다. (昨見氏歸于川上不勝分 恚) 수여지전)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부끄러워서 도저히 나라 사람들을 볼 수가 없다. 퇴이사 “당신이 조정에 알려 적당한 것으로 나를 숨기도록 하라”(이고아조차아물)고 하셨습니다.” 이에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고요우에마쓰 나나에우료마에)

서기 236년(히가시 텡노)10년 봄 2월 오의 손권이 사신의 호위를 하고 우호 관계를 요구했다.(시월 吳왕 손 부분견사 통화)왕은 그 사신을 잡아 놓고, 가을 7월이 되고 목을 자르고 머리를 위에 보냈다.(왕도 그 사용마지막 가을 칠월 참수의전수 어위)

고구려는 멀리 있는 오보다 가까이에 있는 위와 관계를 유지하기로 외교 방침을 정한 것이다.그러나 사신의 머리통을 쪼개서 위나라에 보내기까지···『 삼국지 』권 3, 『 위서 3』, 『 목숨 제기 』, 『 청룡 4년(236)『 가을 7월 조 』 않나!!!청룡 4년(236년)가을 7월 고구려 왕궁이 손권의 사신 호위 등의 목을 베고 류저우로 보냈다.(청룡 네년 가을 칠월고구려 왕궁 참 송손 권사 호위 등 수예유 주)서기 237년(히가시 텡노)11년,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연호를 바꾼 것을 축하했다.(십일년 견사 여위하개)이 나이가 경 처음 원년이다.(이것 경초)서기 238년(히가시 텡노)12년 위나라의 유우 시바 선왕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을 토벌하면 왕이 주부와 대가를 보내병사 1,000명을 거느리고 이를 돕도록 했다.(십이년 위 크기 푸 시바 선 왕률 중토 공손연왕 견주부·대가장병 천명 조지)[삼국지·위지, 동이전·고구려]게이초 2년(A.D.238:고구려·히가시 텡노 12)태위·시바 선왕이 군대를 이끌고 공손연을 토벌하면(위)궁이 주부와 대가를 파견했고 수천명의 병사를 이끌고(시바 선왕의)군대를 도왔다.(경초 두년 태위 시바 선 왕률 중토 공손연미야 견주부 대가 장수 천명 스케군)공손연(?~237):중국 위(위)나라의무장이다.228년 요동 지방에서 자립하고 오의 손권의 동맹 제의를 물리치고 위나라 명제에서 요동 태수가 막혔지만 스스로 연왕이라고 칭하고 시바의와 고구려 연합군에 패한 처형됐다.공손연을 토벌한 시바 이 왕은 우리가 삼국지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그 시바의이다.서기 242(동천왕) 16년 왕이 장군을 보내 요동 안평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16년 왕견장습파요동서안평)[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세이시 3년(A.D.242:고구려 동천 왕 16)에(위)궁이 시안 타이라를 약탈했다.5년에는 유주 자사 무구 검에 격파되었으나 그 때 사실은 무구 검의 열전에 올랐다.(세이시 삼년 궁구 시안 타이라 그 오백년 위유사毌 구검)오의 사신의 목을 자르고 공손연 토벌에도 참여하는 등 위나라와 친해지려 노력했지만 위가 공손 씨 정권을 망치는 랴오둥 지방을 점령한 결과 위의 영토를 공격하는가?관련된 고구려 측의 기록이 없어 생각과 계획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중국 삼국 시대의 혼란을 기회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못된 판단이었던 것 같다.이 때문에 고구려는 몇년 후, 세키구치 검(무구 검)의 침입을 받아 건국 이래 최악의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서기 243년(히가시 텡노)17년 봄 정월, 왕자의 총불을 세자로 책봉한다(기념하고 사면을 했다.십칠 설날 중립 왕자 사국 씨)서기 245년(히가시 텡노)19년 봄 3월 동해 사람이 미녀를 바치니 왕이 후궁으로 받아들였다.(십구년 봄 삼월 동해인 헌羙 여자)(히가시 텡노 19년)겨울 10월, 군인을 내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했다.(겨울 시월 출사 침신 나 키타 변)[신라 본기](조, 문왕)16년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방에 침입했다.(십육년 겨울 시월 고구 려침 키타 변)우로 가 군사를 이끌고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고 마두 책을 지켰다.(우로 장병 출격 논 요시퇴보 마두 울타리)그날 밤 너무 추웠지만 우로 가 군사를 위로하고 스스로 장작을 태워서 그들을 따뜻하게 주면 병사들이 감격했다.(그 밤 고한그러나 로로”사졸 궁소 시난의 심장 감격”)『 삼국 사기 』은 고구려 본기의 기록상 신라에 대한 최초의 기사이지만, 첫 장부터 싸우고 있다.다만 3년 후의 248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오고 일단 화친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서기 246년(히가시 텡노)20년 가을 8월, 위나라 류저우 자사 세키구치 칼이 10,000명의 병력으로 현도에서 침략했다.(이십 가을 팔월위 견유사 나온 현도 래침)왕이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이끌고 비류 수로 싸워서 패배시킨 것으로 베는 머리가 3천급 정도였다.(왕장 보기 두 만명 역류 수상패 3천 여급)또 병력을 이끌고 다시 영양 맥의 계곡에서 싸워서 이겼으나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3천 여명이었다.(또 인병 재)왕이 많은 장수에 대해서,”위나라의 대병력은 오히려 우리의 적의 병력보다 떨어지고 세키구치 검이라는 사람은 위나라의 명장이라고 했지만 오늘은 목숨이 내 손 안에 있어.”(위),”위의 대병 여아)”이라며 철기 병 5,000명을 이끌고 공격했다.(내령 철기 다섯)세키구치 칼이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워서 고구려군이 대패한 죽은 자가 1만 8천 여명이었다.(검위 방진결사 망이)의 왕이 기병 1천 여 기병을 이끌고 압록강원으로 퇴각했다.(왕이 천 여기분압 渌원)전쟁 관련 숫자는 기록대로 믿는 것은 아니다.상대의 기록도 한국의 기록도 마찬가지다.관구 검사의 침입에는 낙랑군, 대방군도 가세하면서 부여도 물자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참여했다(아래).[삼국지 위지 동 부여전]···세이시 연간(A.D.240~248:고구려 동천 왕 14~중 천왕 1)에 유 카네코 생각 무구 칼이 고구려를 토벌하고 현도 태수를 부여에 파견했다.(세이시 중유사 毌구 검토 구려 씀 현도 태수)위거은 대가을 보내고 교 밖에서[왕頎를] 맞도록 하고 물자를 제공했다.(위거 씀 대가 교영종자 군량)(히가시 텡노 20년)겨울 10월 세키구치 칼이 환 도성을 함락시킨 뒤 성내를 도륙하고 장군 왕치를 보내고 왕을 추격했다.(겨울 시월 검공 䧟환 도성 도왕)이 남 옥저를 피할 죽령에 이르렀지만, 병사들은 흩어져서 거의 없고, 그냥 동부 밀우만 혼자 옆을 달렸지만 왕에게 말했다.(왕분 미나미 옥저지 위 죽령)”이번 추격하는 군대가 눈앞에 다가온 것으로 이 형세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이번 추가병 심박세력이 가脫)부탁하는데 신이 결사적으로 막아 보니까 그 사이에 왕은 피하세요.”(신하 청결)(밀우이)결사대를 모으고 그들과 함께 적진에 몰리면서 힘껏 싸웠다.(수모 시체 여지 부적력전쟁)왕이 샛길로 빠져나가고 산의 골짜기에 의존하고 흩어진 군졸을 모아 스스로 방비하면서 말하기를(왕 간 행脫 이거의뢰 산곡 취산 졸업)”밀우을 데려오는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주었다”(약유 노토로 宻우자두꺼운 상지)이라고 말했다.하부의 유·옥그가 앞으로 나가는 답했고”신이 가 보겠습니다”(신시 왕언)이라고 말했다.(유·옥그이)마침내 전장에서 땅바닥으로 넘어졌던 밀우를 찾아 등에 업고 돌아왔다.(수어 전쟁터노 부 이지)왕이 그를 무릎에 눕히자 잠시 후 눈을 떴다.(왕 침지 이고 구이 내소)대진(大盡) : 거의 태(太), 다진(多ジン) – 거의 없어짐 / (부) : 다달나, 나아가다, 열심히 하다 / 가랑이 (높이) : 허벅지왕이 샛길을 전전하고 미나미 옥저에 이르렀지만 위 군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왕 간 행전 전지 미나미 옥저 위에 고정)왕이 더 이상 생각해내는 방법도 없고 주춤해서 어쩌지 못하면서 동부 사람 유 유가 나오고 말했다.(왕 모두 가난 세굴부지소 때문)”형세가 매우 위험한 긴박하고있습니다만, 이대로 헛되이 죽을 수는 없지요.(세심 위박불가 개죽음)신에게 어리석은 계략이 하나 있으니(신유 우계)부탁하면(왕이)위 군에 음식을 호랑이 궤하신다면 그 간격을 보고그들의 장수를 쏘아 죽이겠습니다.(청약 이음식 생호 위)만약 신의 계략이 성공하면 왕은 힘껏 쳐서 꼭 승리를 거둬 주세요”(약신 총 이득 성칙)왕의 말에 의하면”그리고”이라고 말했다.(왕 일 승낙)개죽음: 헛된 죽음/희생(생):희생하고 호(학위):호주 궤(군사에 음식을 주고 위로)/사극(시대극): 엿보는 죽음, 틈 연극-기회를 엿보았다/척살(자살)=자살-칼 등으로 찔러서 죽인다/분擊(격분):분발하고 공격한다.유 유가 위군 캠프에 가서 거짓으로 항복했다.(뉴유 입위)”우리 왕이 강대국에 죄를 저지르고 피하고 해변에 이르렀지만 더 이상 피하지 못하고 장래 장군 앞에 나와서 항복을 요구하고 처분을 기다리라고 하지만 먼저 소신을 보내고 허름한 음식이라도 바치고 장군의 병사들의 위로가 된다고 합니다”(과군 획죄 이르러)(대국 도지 해빈조궁, 무지 장이 청강 어진, 전귀, 초등 신하 해결, 불전)위의 장군이 이 말을 듣고 항복을 받으려고 했는데(왕)이 그 틈을 노리고 칼 위에 몸을 기어들며 그 후에 칼로 숨 끊습니다.(뉴유 은도 식기 진전 발도자위 장胷 아타 죽음 위 군 수란)왕이 군을 3개 도로 나누고 재빨리 그들을 공격하자 위군이 우왕좌왕의 진을 치지 못했지만 마침내 낙랑에서 퇴각했다.(왕 만큼 군 때문 삼도급擊지 위 군 요란 불능 천수자 악랑 이퇴)조궁 무지(궁터):몸 둘곳이 없다/사구(사구):고대 중국에서 형벌과 경찰을 지냈던 관서와 말한/전(전): 두껍고, 준비한 음식이 많고 좋은-불 전지 것은 하찮은 것(음식)의 의미/胷(흉조):가슴.[삼국지 위지 30동이전식(구고려, 예)]···세이시6년(245)에 낙랑 태수유 시게루와 대방 태수유미 시타 가우는[대]땅히가시의 구고려, 예가[고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키고 정벌했는데 불량 내후들이 마을을 들고 항복했다.세이시 8년(247)···[위나라의]조정에 조공하고, 불 내濊 왕에 봉한.[불 내濊 왕은]국민 사이에 섞여서 살면서 계절마다군에 와서 아침 알현하닸다.두 군으로 전역이 있어 조稅을 거둘 있으면[구고려, 예 백성들도]공급하고 사역을 시키고 마치[군]민처럼 다뤘다.245~246년경에 위나라 류저우 자사 세키구치 검이 고구려에 파고들어 와서 환 도성을 함락하고 장군 왕치를 보내고 미나미 옥저에 피난한 히가시 텡노를 추격하는 동시에 낙랑군과 대방군의 군사는 다르게 동해안의 예지 지역을 공격하고 점령했다는 내용이다.한편 본 기사에 의하면 동천 왕이<남 옥저>으로 사태를 수습하는 도에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지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동천 왕이 남쪽 옥저에서 다시 북 옥저까지 피란 위나라 군이 이를 뒤쫓아 북 옥저 및 숙신의 땅에 이르렀다고 한다.시모.[삼국지·위지, 동이전·히가시 옥저]···세키구치 칼이 구 레이를 토벌할 때 구 레이의 왕궁이 옥 물가에 도망 치는 바람에(세키구치 검)군대를 진격시키고 그를 공격하게 됐으며 이에 대해서 옥저의 읍락도 모두 파괴되고 3천 여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을 수 있다면, 궁은 키타 옥저에 달아났다.(毌구 검토 구려 구려 왕궁 분옥 저수진 사擊의옥저 읍락 모두 파지참획 수로 3천 여급궁분 키타 옥저)왕이 수도로 돌아와서 혼란을 수습한 후 논공 행상을 할 때 밀우과 여유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왕 복(상위복), 이宻 친구·뉴유 때문 제일), 물에 거곡과 아오키 계곡을 유·옥그에 압록강 머리 너허원을 식읍에 하사했다.사밀 우거(계곡·아오키 계곡·강변·이위 식읍.)( 죽은)한가를 추증하고 사용자로 그의 아들 다음을 대 사자로 했다.(추증 뉴유 때문구 사자또 이기 자다 우위 대사자)추증(追贈) : 나라에 공적이 있는 관리가 죽은 후 그의 작위를 높이는 것.이 전쟁에서 위나라 장수가 숙신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그 공을 돌에 새기고 또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江江戸城:강호의 공적)을 새기고 돌아갔다. (고레야 위장도숙신남계각석기㓛 마타이도마루토야마 메이부나이죠오키(名不耐城而歸)환도산 이하는 매끄럽게 이해할 수 없다. 여기저기 공적을 새기고 돌아갔다는 취지일 것이다.이전(고구려)신하의 이익 이후는 히가시 텡노가 중국을 침범하고 어기는 것을 보고몇번이나 반대 의견을 냈지만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첫 그 신하 득래보는 중국 수간왕 부종)이득 만이 한탄하기는(이득 래탄 일)”이 땅이 장래 폐허가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이라며 음식을 안 먹고 굶어 죽었다.(타츠미 이 땅 장생봉호 수 사망), 세키구치 칼이 병사들에게 명령하고 그의 묘소를 훼손하거나 무덤 주변의 나무를 쪼갤 수 없게 했고, 포로가 된 그의 처자를 모두 석방했다.(무구 검령 제군 견고함 그 무덤의 벌기 수이득 그 처자 개방 씀요)봉호(봉호):요모기톡레이 히가시 텡노에 “중국 땅을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여러 차례 진언했지만 임금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장래 중국의 공격을 받고 고구려는 쑥밭이 된다”이라고 예측한다.스스로 굶어 죽었다는 내용이다.베크가 숙제가 굶어 죽었다는 것은 그래도 이해하지만 도우크레이 굶어 죽은 이야기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중국에 망명하거나 아니면 조정에서 물러나고 어디 지방에 가서 살거나 하면 좋은 일이지 굶어 죽는 이유까지 있을까.어쨌든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이득에 걸친 처사는 중국 때문에 기특한 것이며 그를 대접해서 준-는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마음 훈훈해지는 이야기이다.『 괄호지 』에는 ” 불내성이 곧 국내성이다.성을 돌로 쌓아 만든.”라고 기록되고 있다.(괄부 두 성, 즉 국가), 우치시 때문의)이점에 비추어 보면 환 도산과 국내성은 서로 가까이 접하고 있었을 것이다.(이 즉 환도 산 아타에 국내성상 접)”양서”에는 “시바의가 공손연을 토벌하겠다고 왕이 장수를 보내안평을 습격하고 이에 세키구치 칼이 침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양 말 의토 공손연)”통감”에는 “득래이 왕에 시정을 건의한 것은 왕위 궁전의 때의 일이다.”라고 되어 있지만 이는 잘못이다.(통감도 이득 래동 왕때문 왕 위宫 시사오야)]세키구치 검(무구 검)의 고구려 침공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위는 단지 고구려에 일손을 보태는 게 아니라(이유는 잘 모르지만)멸망전을 벌인 것 같다.남쪽의 낙랑군, 대방군까지 동원해서 고구려를 공격하고 달아나는 히가시 텡노를 고구려의 동쪽 끝까지 집요하게 쫓아갔다.다행히도 히가시 텡노는 잡히지 않고, 고구려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이때 고구려의 땅에 들어온 위에 힘입어 고구려를 포함한 한반도 일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이루어진 것으로 이때의 기록이 기반으로 삼국 지위의 지동 여전히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세키구치 검의 침공 이후)마침내(동쪽)국가들을 두루 관찰하고 그들의 나라의 법령과 습속을 수집하고 국가의 대소의 구분과 각국의 명칭을 상세히 기록할 수 있었다”라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서문의 기록은 이에 대해서 말이다.건국 후 주저 없이 영토를 확장하고 멀리 오른쪽 북 평등의 4군을 쓸랴오서에 10개 성을 쌓는 등(중국 측도 한국 측도 기록이 불충분으로 잘 이해할 수 없지만)잘 된 고구려가 어느 시기부터 조용히 되어 중국 측이 “고구려가 새로 나라를 세운 “으로 인식할 정도로 극적인 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세키구치 검의 침입이 있었던 것이다.서기 247년(히가시 텡노)21년 봄 2월 왕은 환 도성이 전란을 겪고 다시 수도로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평양 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 사직을 옮겼다.(이십 일년봄 두월 왕이 말 도성이 지난 란 불가 또 츠즈키 평양 성 이민 급묘사)평양은 본래선인 왕검의땅이다.(평양인 왕검)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고 왕 효험에 도읍을 둔 “로 표기되고 있다.(혹운 왕의 도도 왕험)경 란(경난): 논다.히가시 텡노 때 세키구치 검의 침입은 고구려에 큰 상처를 남기고 이익 이후 예언대로 폐허가 된 모양이다.고구려는 그동안<졸본 → 국내 → 환도>의 순서로 도읍을 옮긴 적이 있지만 큰 화근이 된 환도 성을 버리고 새로운 곳에 도읍을 옮겼다는 내용이다.옮겼다는도의 이름이 “평양 성”이다.이 평양은 북한의 평양?이런 저런 사정을 감안하면 그게 아닌 모양이다.다만 김·부산식들은 히가시 텡노가 새로 옮긴 수도 평양이 “본래 선인 왕검의 땅”이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아마도 북한 평양을 염두에 둔 말 같다.『 삼국 유사 』권 제1 제1기이 고조선 왕검 조선에 대해서는 『 옛 기록 』에 의하면…(곰 여자가)임신하고 아들을 낳고 단군 왕검(단군;왕검)이라고 말했다.당나라 고 임금이 즉위 50년이 되는 경인(경인)에서 평양 성(평양 송)”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 조선이라고 말했다.···일연은 『 옛 기록 』에 근거하여 단 임금 검의 이야기를 삼국 유사에 썼다.고기에 따르면 왕 검이 처음 서울로 간 것이 “평양 성”이라고 하지만”지금(고려)의 서경(북한 평양)이다”라는 주석은 일연이 붙인 것으로 고기 자체의 내용은 아니다.어쨌든 돈 부식 등도 위에 “옛 기록”의 내용을 알았고 그것을 언급한 것이 본 기사라고 생각된다.다만,<선인 왕검의 땅이다>라는 때의<왕검>는 사람의 명칭이지만, 이와 달리<왕이 되어 왕검의 땅으로 도읍을 둔>라며 왕검이라는 것은 지명으로서 사용된 사례도 일부 있으므로 김·부산식이 이에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지명으로서 사용된 예는 다음.[사마천 정-사기 조선 열전]···연왕·라오관이(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에 들어가면(위)만도 망명했다.무리 천 여명을 모아 북상 사투에 만족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달아나고(랴오둥)요새를 나오고 패수을 건너 진통(하타)의 옛 공지인 상하장에 살았다.점점 진 번, 조선의 만 에비스(만이)및 구 쓰바메·히토시의 망명자들을 복속시키고 거느리고 왕이 됐고 왕험에 도읍을 정했다.(연왕 노관 반 넣고 흉노만족 망명 취당 천 여인魋결 만이 복이 동주가 보루도浿 물 거진 고 공지상 하鄣약간 역속 진번·조선 만이 및 고 연산·히토시 망명자 왕의도도 왕험)서기 248년(히가시 텡노)22년 봄 2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고 화친을 맺었다.(이십 이년 봄 두월 신라 견사 결 합)(히가시 텡노 22년)가을 9월, 왕이 죽었다.(가을 구월 왕훙), 시원에 묻어 버리고 왕 이름을 히가시 텡노로 정했다.(장례 어시 동천 왕)나라 사람들이 왕의 은덕을 생각하고 모두 슬퍼하고 있었다.(고 쿠진 회기 은혜 덕막) 가까운 신하로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따르고 죽는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새로운 왕이 예에서는 없다며 이를 금지했다.(기 나이·신하 욕심자·왕 이위 비례, 금지)의 장례식에 이르는 무덤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지 상 일본 사람들이 잡목을 베고 죽은 사람의 시신을 뒤덮은 것으로 그 토지의 이름을 시원이라고 말했다.(고 쿠진 벌시 이복 그 시체 수 이름왈시) 제12대중 천왕 중 천왕[중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련불인, 히가시 텡노의 아들이다.(나카가와 왕휘 연불)혹운 동천 왕 유키코는 외모가 뛰어나고 지략이 있었다.(본보기 준상)히가시 텡노 17년에 왕 태자로 채봉됐지만 22년 가을 9월(동천)왕이 사망과 즉위했다.히가시카와 십칠년 아키코 이십이 구월 왕훙타이)서기 248년(중 천왕 원년)겨울 10월 연기 씨를 왕후로 했다.(겨울 시월 중립 연 그 왕후)(중 천왕 원년)11월 왕의 동생인 예물과 사구 등이 반역을 꾀했다가 처형됐다.(십일월 왕제 예물·사구 등 모반의 주)복주(복주) : 형벌을 받아 죽음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고구려의 권력관계는 여전히 불안정하다.서기 250년(중 천왕)3년 봄 2월 왕이 상명림 어수을 시켜서 안팎의 병마 업무를 겸직하도록 했다.(삼년 봄 두월왕명 지각 안팎 마사)서기 251년(중 천왕)4년 여름 4월, 왕이 관 나 여사를 가죽 부대에 넣어 서해에 던졌다.(네년 여름 네월 왕 이관 나부인 치혁의 재료 투수 노는 서해.)관나 부인은 얼굴이 아름다운 모습이 예쁘고 머리 길이가 9척이나 되었지만, 왕이 그를 아끼고 장래의 든 코오로 만들려고 했다.(관나 부인안색 화려 머리카락왕 아이 초 황후)왕후 연기 씨는 그녀가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왕에게 말했다.(왕후 연 씨 일)”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서쪽 위나라가 긴 머리를 찾아 천금을 내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첩 문경 서위 구김)옛날에 우리 선왕이 중국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 전란을 받고 피하기 위해서 사직을 거의 잃었습니다.(석아 선왕의 예 이르러중국 강제병 출분 태상 사직)지금 왕이 그들이 원하는 곳에 따르고 사신을 보내고 장발 미인을 바친다면 그들은 반드시 흔쾌히 받아들이고 다시 침략하기는 없죠.”(지금 왕소 욕심씀 한)왕이 그 의미를 알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왕 토모 그 뜻묵부 답)(정부나 여사가 그 말을 듣고 날이 가해질 것임을 두려워하고 오히려 왕이 왕후를 참고했다.(부인 들)”왕비가 항상 나의 욕을 하며, 『 시골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왕후 상매 첩 일)만약 스스로 돌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젊은 불량 차 아리 후회라 하였습니다.보면 왕후가 대왕이 없는 틈을 노리고 나를 해치려는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뜻자 후욕 무엇)후에 왕이 기구로 사냥을 하고 돌아오면 부인이 가죽 부대를 가지고(왕을) 맞아 울며 말했다.(후 왕 렵우 기구 이환남편)”왕비가 나를 이곳에 넣어 바다에 투척했습니다.(후욕 이첩 성차 던진 바다)바라건대 대왕은 저의 미천한 목숨에 은혜를 베풀어 집에 돌아가세요.(유키가)왜 또(대왕)곁에서 섬길 것을 원하십니까?”(뭐 감경 망시 좌우 호)왕은 그것이 거짓말임을 알고 화가 나서 아내에게 말해(왕 문제 지 기사노위 부인 일)”네가 바다 속에 들어가고 싶은가?”(여요 이리 우미 호)이라며 사람에게 맡기고 그녀를(바다) 집어 던졌다.(사인 투지)집에 돌아가고 싶으면 보내어 줄지, 다른 조치를 취하면 좋은 것을 굳이 바다에 던지고 죽이겠는가..···관나 부인이 불쌍한 것과는 별 관심을 끄는 것이 “서해”에 관한 언급이다.중 천왕과 왕비, 관나 부인은 모두, 도의 왕궁에 사는 사람들이겠지만, 바다 이야기가 점점 나오는 것은 그만큼 바다, 특히 서쪽에 바다가 가깝다는 것 아닌가.247년에 선왕의 히가시 텡노가 환 도성으로부터<평양 성>에 도읍을 옮기고 그리고 7년이 지난 이 시기 중 천왕 등은 그 평양 성에 있을 텐데, 혹시 서해가 가까울까.서기 254년(중 천왕)7년 여름 4월 국장 명의림 어수이 떠나자 비류 패자의 음우을(새로)국장으로 임명했다.나나 네월국 상명식 패자 국상(중 천왕 7년)가을 7월 지진이 일어났다.(가을 칠월 지진)서기 255년(중 천왕)8년 왕자 약 화로를 지어 세자로 나라 중에서 사면을 했다.(팔 약로 때문 사자내국 타이)서기 256년(중 천왕)9년 겨울 11월 요나묘은림호도을 공주에게 시집 보내고 솥 우마미치 정도로 했다.구년 겨울 열 한달 더 연나 공주 때문 駙마 도위)(중 천왕 9년)12월, 눈이 오지 않고 큰 전염병이 달렸다.(십이월, 눈대구제역)서기 259년(중 천왕)12년 겨울 12월 왕이 두 하늘 골짜기에서 사냥을 했다.(십이월 왕 전우 두눌 니시노야)위의 장군 위지[이름이 장릉의 이름을 저지른]이 군사를 거느리고 파고들며 왔다.(위장 위지[이름범]장병 래벌)왕이 정예 기병 5,000명을 선발하고 양맥의 골짜기에서 싸우고 이를 물리쳤지만 벤 머리가 8천급 정도였다.(왕 관 정기 5천전어 량맥 지곡 패지참수 8천 여급)장릉은 고려 인종의 능호이다.인종의 이름이 바다(해서)이지만 이번 고구려를 침공한 위나라 장수, 위지해(노인 지해)의 이름 마지막 글자, 해서가 고려 인종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위장의 이름을 해서를 제외하고”위지”만으로 기록하고 주석을 붙인 것이다.잘린 머리가 8천 여급이라면 엄청난 대승을 거둔 것이지만, 세키구치 검의 침입 이후 13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서기 260년(중 천왕)13년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십삼년 가을 구월 왕여 졸도 사시 조묘)서기 262년(중 천왕)15년 가을 7월, 왕이 기구로 사냥을 하다가 흰 노루를 잡았다.(십오년 가을 나나 백獐)(중 천왕)15년 겨울 11월, 천둥 지진이 일어났다.(겨울 열 한달천둥 지진)서기265년265년 중국에서는 사마염이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진조를 수립하였다. 이후 서기 280년 우나라까지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했다.265년 중국에서는 사마염이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진조를 수립하였다. 이후 서기 280년 우나라까지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했다.도해(도해): 백성을 도살하고 해친다/부용은 점령하고 직접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속국으로 만들어 영향력을 행사했다-정도로 이해.서기 285년[진서·동이 열전·부여국]…(서진)의 무제 때에는(부여가 자주 와서 조공을 바쳤으나 태강 6년(A.D.285:고구려·니시 텡노 16)까지는 모용 廆의 습격을 받아 패하였다(부여)왕 의려은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옥저에 도망치다 목숨을 보전했다.무제는 그들 때문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냈다.”남편 여왕이 대대로 충성과 효도를 지키고 왔지만 나쁜 만족에 파괴된 것을 매우 아쉽다.만약 그의 유족으로서 복국 만한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방안을 강구하고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해라”이라며 유사가 보고하도록”마모루 동이 학교 우리 영이 부여를 구원하지 않자 기민하게 대응할 기회를 놓쳤어요 “이라고 말했다.(무제가)조서를 내리고(선우)영광을 파면시키고 몇 감실에 교체했다.이듬해 부여는 하승진 껌에 사자를 파견하고 현재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서 다시 옛 나라를 회복하기를 바라고 원조를 요청했다.(아래) 달콤하는 전열을 정비하고 독우 매침을 파견하고 병력을 이끌고(부여의 사자를)호송시켰다.(모 연)밖도 다시 그들을 길에서 기다렸으나(가)찜이(모 연)밖과 싸우고 크게 부수자(모 연)밖의 군대는 물러나고()이라는 나라를 회복했다… 그렇긴서기 286년(서천 왕)17년 봄 2월 왕의 동생인 일본 차와 서 바루 두 사람이 반역을 꾀했다.(십칠월 왕제 일우·소발 등 두 모반)병을 사칭하고 온천에 가서 자신의 무리와 놀고 즐기는 데 절제가 없는, 도리에 어긋나고 불순한 말을 퍼뜨렸다.(사칭 병왕 온탕여당 류희 편한 무절나오언패 반대)왕이 거짓으로 재상의 관직을 내리라고 부르며 그들이 오면 힘센 장사로 붙잡아 살해하게 했다.(왕 소지 위허 배상 및 그 지 영력사집이 주지)서기 286년[백제 본기의 방안 계왕 원년]고구려가 다이 보우를 치면 다이 보우가 백제에 구원을 요청했다.(고구 려벌 대방 청구 어아)이에 앞서고 왕이 대방 왕의 딸 보과에 시집 부인으로 둔 게 있으니( 선 이것왕 취대인의 고향 일)”대체적으로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라서, 그 요청에 응할 수밖에 없는 “이라고 말했다.(대방 아구 생지국, 불가)마침내 군대를 내서 구하면 고구려가 원망한다.(수 출사 구한다)왕은 그들이 파고들며 온 약탈을 하지 않을까 걱정했다가 아차 성과 사성을 수리하고 대비했다.(왕려 그 침구수아 당 성·虵성 비지)서기 288년(서천 왕)19년 여름 4월, 왕이 카미시로에 행차하였다.(십구년 여름 네월 왕이 신성)바다야 태수가 경어 나무를 진상했으나 밤에 빛이 나왔다.(바다 계곡 대수 헌경 어목 밤 아리미쯔 19년)가을 8월 왕이 동쪽으로 사냥을 나온 흰사슴을 붙잡았다.(가을 팔월 왕 히가시 수획 흰색사슴)(니시 텡노 19년)9월 지진이 일어났다.(구월 지진)(서천 왕 19년)겨울 11월 왕이 카미시로에서 돌아왔다.겨울 열 한달 임금지 차 신성)서기 292년(니시 텡노)23년 왕이 숨졌다.(이십삼년 왕훙)서천의 들판에 묻어 버리고 왕 이름을 서천 왕으로 정했다.(장어 니시카와 노하라 호왈 니시카와 왕) 제14대펑샹 왕 서기 292년 펑샹 왕[꿩 칡이라고도 한다]는 이름이 상부[ᆸ시루라고도한다이라고도 한다]이며, 서천 왕의 태자이다.(봉)시호 니시카와 왕 유키코정) 어려서부터 오만으로 방탕, 의심과 시기가 많았다.(㓜교 피하는 의기)니시 텡노가 재위 23년에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니시카와 왕 이십(펑샹 왕)원년 봄 3월 안국군들 집을 죽였다.(원년 봄 삼월 살해 안국 군 달가)들 집이 아버지의 행렬에 있는 큰 공적과 업적이 있어서 백성이 우러러 보면 왕이 그를 의심하고 음모를 꾸미고 죽인 것이다.(왕 이가 주 제 아버지 유키 행유 큰 공, 고의)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국민 일)”안국군이 아니었다면 백성은 양맥, 숙신의 난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미세 안국 군백성 불능 로멩 량맥·숙신)지금 그가 죽었으니 장래 누구한테?”(지금 그)과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자기 부정 휘체 상조.)첨망(망望) : 올려다보다 첨 – 우러러보다 / 휘涕(휘체) : 휘두르다, 누체.(펑샹 왕 원년)가을 9월 지진이 일어났다.가을 구월 지진)서기 293년(펑샹 왕)2년 가을 8월 모용 밖이 침략했다.(두년 가을 팔월 모용 廆 래침)왕이 신성에 가서 적을 피하려 했다.(왕 욕왕 신성 피전 도둑)행차가 곡림에 이르렀지만 모용 밖이 왕이 떠난 것을 알고 병력을 이끌고 추격했다.(행 지곡 숲 모용 廆지 왕출 할인병 추지)거의 따라잡으면, 왕이 두려웠다.(장급)이때 신·성재 북부 소형액 노자가 기병 500기를 이끌고 왕을 마중 왔지만 원수를 만나고 그들을 한껏 공격하자 모용 밖의 군대가 패하고 물러났다.(때 신청·북부 초등 형고 노자·령왕·봉적 분擊)왕이 기뻐하며 고노 자원의 관직을 상대로 더 곡림을 식읍.에게 주었다.(오요 시온 가고 놈 자작 때문 대형겸 사곡 숲 때문 식읍.)모용 밖(모용 廆):16국 시대에 활동한 선비 족(선비족)모용부장에서 앞 제비를 세운 모용 아키라(모용 皝)의 아버지이다.285년에 부여를 공격하고 멸망시킨 사람이다.(이후 부여는 서진의 도움으로 복국됐지만 그 가운데 상당수의 부여 유민들이 고구려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펑샹 왕 2년)9월, 왕이 그 동생 도루고이 다른 마음을 갖고 독약을 내린 자결시켰다.(구월 왕위 그 동생 돌 고유 이심 사사)나라 사람들은 녹봉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며 이를 비통하게 생각했다.(고 쿠진 이돌 굳게 무죄아이 통지)달러고 아들을 불은 성 밖으로 피해서 숨었다.(어 고자 을불출둔 어야)遯둔: 도망치다, 숨다, 피하다.서기 294년(펑샹 왕)3년 가을 9월 국상)가 죽자 남부의 대사자·창창리를 국상으로 관직을 올리고 대주부로 했다.(삼년 가을 구월국 장관 또한 루 졸업 이남부 대학국 장관진작 때문)서기 296년(봉 카미 왕)5년 가을 8월 모용 밖이 침략했다.(다섯년 가을 팔월 모용 廆 래침), 고 쿠니 하라에 이르는 니시 텡노의 무덤을 보고사람에 파게 한.마지막 고국 원견 니시카와 왕묘 사인 발의)묘를 파헤친 자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있으며, 무덤 속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서 귀신이 있을까봐 두려워하고 곧 물러났다.(배우 아라 급사자 우라 목소리무서운)왕이 많은 신하에게 말하고서는(왕 위군 신왈)”모용 씨는 군사력이 강하므로 우리의 강 지역을 반복 침범하므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모용 씨 병)라고 하면 국가상 창조리가 대답하도록(상국 그라 스케 이익-일)”북부의 대형 그는 현명하고 용감합니다.(북부 대형 고노 자현 겨우 용기)대왕이 만약 적을 방어하며 백성을 안정시키려면 고 노자 이외에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대왕 약욕 어구 안민 비자 무용용자)이라고 말했다.왕이 고 노자를 신성 태수로 했으나 백성을 잘 다스리고 위세와 명성이 있어서 모용 밖이 다시 파고들며 오지 않았다.(이고 놈 자위 신성 대수 선정 유위 목소리모용 廆)서기 298년(펑샹 왕)7년 가을 9월 서리와 우박이 농사를 망치고 백성이 굶주렸다.(일곱 구월 상박 도살 코크민기)(펑샹 왕 7년)겨울 10월, 왕이 더 궁실을 세웠는데 매우 사치로 화려했다.(겨울 시월 왕증 영宫실파극 치려)국민이 굶주리고 고통으로 여러 신하가 잘 시정을 건의했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민기 차곤 군신 취간 부종)격(頗): 잘, 꽤,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치려: 사치스러운 치(チ) 아름다운/驟: 달리다 몰아붙이다 – 驟간(諫)은 ‘잘 간언하다’의 뜻인 것 같다.(펑샹 왕 7년)11월 왕이 사람을 시켜서 을 불을 찾아 죽이겠다고 했으나 성공하지 않았다.(십일월 왕 사인밧줄 을 불살)서기 299년(펑샹 왕)8년 가을 9월 봉산에서 귀신이 울고,(팔년 가을 구월 귀곡 우봉 산)손님 성이 달을 저질렀다.손님 별범 월(펑샹 왕 8년)겨울 12월, 천둥 지진이 일어났다.겨울 십이월 천둥)서기 300년(펑샹 왕)9년 봄 정월, 지진이 일어났다.(구년 봄 정월 지진)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서로 식베합우 정도였다.(두월의 비백성상식)(펑샹 왕 9년)8월 왕이 나라 안의 남녀 15세 이상을 징발하고 대궐을 수리했다.(팔월 왕 발 국내 남녀 5·이상 수리 宫실)식량 부족과 부역의 고통으로 백성이 유망했다.(백성 핍어식 곤어 역 치나미의 유실)창조리가 진언했다.(쿠라 스케 이자 간왈)”하늘의 재난이 반복되면서 올해는 곡물이 무르익지 않고 백성이 사는 곳을 잃었습니다.(천재 천지 부등려민 실 곳)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노인과 아이들은( 죽어)밑바닥에 굴러다닙니다.(츠요시자 방랑 사방 옹 㓜전 호 구학)이건 정말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고 삼가 두려움, 자신을 수양하고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이 성외 공구민 유 수성의 시야)대왕이 과거 이를 생각 없이 굶주린 사람들을 몰아 나무와 돌로 하는 공사에 시달리기는 백성의 부모 된 의미에 매우 어긋난 것이에요.(대왕 증조 코레 흐지 마유키 히토 곤목 석지민 부모의 뜻)게다가 근처에 강력한 적이 있는데, 만약 우리가 피폐한 틈을 타고 그들이 파고들며 오면 사직과 백성을 어떻게 합니까?(이황 비린는 강경, 그때는 사㮨· 생민 뭐)원컨대 대왕은 이를 진심으로 살피세요.”(소원 다이오 학원 계지)왕이 화가 나서 말했다.(왕 온왈)”왕이라는 것은 백성의 올려다보는 곳이다.(너자 농민의 소첨 망야)대궐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宫실 무이 시위 중)지금 나라 장관은 과인을 비방함으로써 백성의 호평을 받는 것이다”(금국상 뚜껑 욕심 방과)챠은죠리이 말했다.(륵리 일)”왕이 백성을 걱정하지 않으면 인에 되지 않고, 신하가 왕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성심이 없습니다.(너 비 충신이오신하, 충신이오)신은 재능이 없는데 국가 장관의 자리에 있으니 굳이 말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왜 굳이 칭찬을 요구하고 말이에요?”(신旣 승핍국 서로 부감 말 없이어찌 감간 예호)왕이 웃으며 말했다.(왕 에미 일)”국상은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다시 말하지 말아 달”(국가 상 욕윈 백성, 무당 후언)荐(천) : 천거하다, 드리다, 늘어놓다 / 여민(려민) = 검수(검수)-“일반민”의 의미 / 愠(온) : <화내다>, 원망하다, 괴로워하다 / 兾(기) : 원한다.창조리는 왕이(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고칠 수 없을 것을 알고 또 바다(해)이 자신에게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고(더 이상 왕에게 간하지 않고) 물러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모의하고 왕을 폐위시키고, 을 불을 맞아(새)왕으로 옹립했다.(스케 리지 왕의 부전겨우 외급 해 퇴여 군신 이 모폐의무카이 을 불위 왕)전(前): 고치다, 깨닫다.왕이 화를 면치 못할 것을 느끼고 스스로 목을 매 죽고 두 아들도 함께 죽었다.(왕 토모, 멩자경 흐타 마타 종이사), 봉산의 들판에 묻어 버리고 왕 이름을 봉 카미 왕으로 정했다.장례 어봉 산 노하라호 왈봉상 왕 서기 300년 제15대 미천 왕 미천 왕[허 양 왕이라고도 불린다]는 이름이 서울 불[다 불이라고도 불린다]에서 서천 왕의 아들인 고추가 도루고의 아들이다.(羙천 왕[한[호양]니시카와 왕 유키코 헌 추가 돌고 유키코)한 찌 미네 카미 왕이 동생 톨고이 다른 마음을 의심하고 그를 죽이자(톨고의)아들을 태우는 날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몸을 피했다.첫 봉상 왕의 불돌 고유 이심 도살)처음에 마모루 실촌의 사람의 음모의 집에 가서 집 살이를 했다.(시취 마을 사람 隂모가초빙 작)음모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매우 괴롭혔다.(隂모 부지 그 하허인 사용)그 집 옆의 풀숲 곳 곳에 개구리가 울면 을 불을 시키고 밤에 기와나 돌을 던지고 그 소리를 내지 못하게, 낮에는 그를 독촉하고 장작을 만들어 오게 해서 잠시도 쉬지 않았다.그 집 측 초택 와명 사용 을 불야 투와 날독부 허잠 숨)을 불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1년 만에 그 집을 떠나고 히가시 무라의 사람 지에모과 함께 소금 장사를 했다.(불량 카츠 간고주년 내거 여지)배를 타고 압록강(압渌)에 이르고 소금을 내리고 강 동쪽의 쓰수이 마을 사람의 집에 머물렀다.(죠지 주저 압渌장염 하기에도 마을 인가)그 집 노파가 소금을 달라고 해서 한마디 정도 주었다.(그)다시 주라고 말하지 않자 그 노파가 원한을 품고 소금 속에 몰래 신을 넣어 두었다.(다시 청부 여지그 할미 한에 잠이 屨치의 안 을 불은(그 사실을) 모르고 짐을 짊어지고 여행에 나섰지만 할머니가 쫓아오고 신을 찾아내고, 을 불이 신을 숨겼다고 압록강 사이에 무고했다.(을불 부지 부이 상도구추 케이블)압록강 사이는 신화 시대에서 소금을 빼앗아 할머니에게 주고 태형 형을 가하는 해석했다.(재이 屨직 취염 여구결태 방지)이렇게(을 불은)외모가 가늘고 여위어 있어 옷이 남루하고 사람들이 그를 봐도 왕손인 줄 몰랐다.(여기에서 형용 고고의상 남루. 히토미의 부지 그 때문 왕 손야)코리(초):나무하고 불패 사투이다,<땔감>.초채=채초:나무 하다/屨(구):구두/廋(물):< 숨기다>, 찾는다/오리 渌재(압록강 사이)는 압록강 사이를 다스리는 관리/고고(고고):초목이 마르고 물기가 없는,< 마르고 파리>나무꾼(소): 나무하다, 불패투다, <땔감>. 나무꾼 = 나무꾼 : 나무하다 / 屨(구) : 구두 / 廋(수) : <숨기다>, 찾다 / 압渌재(압록재)는 압록재를 다스리는 관리 / 고 槁(고고) : 초목이 마르고 물기가 없는, <살 빼고 파리>효(孝): 본받고 흉내내다/노(路): 갈대/업은 맥락에 맞지 않는다. 잎으로 이해.(미를 원년)겨울 10월, 노란 안개로 사방이 막혔다.(겨울 시월 황무)(미를 원년)11월 바람이 서북쪽에서 불어오고 엿새 동안도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십일월 풍종 서북, 풍선사 경주일)(미를 원년)12월, 혜성이 동쪽으로 나타났다.(십이월 별 패우 동방)서기 300년 3월[신라본기] [지린왕 3년(300년) 3월] 낙랑과 대방 양국이 항복하여 복속해 왔다.(낙랑, 대방 两국귀복)서기 302년(미를)3년 가을 9월, 왕이 병력 30,000명을 이끌고 현도 군을 침략하고 8,000명을 생포해서 그들을 평양으로 옮겼다.(삼년 가을 구월임금률병 세 만침현 도군 로획 8천명 이지 평양)동천왕이 환도성에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포로 8000명을 옮긴 평양은 그 평양일 것이다.서기 311년(미천왕) 12년, 가을 8월 장군을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12년 가을 8월) 견장습취료東西安平)[양서 동이 열전 고구려]···스스무 융자(A.D.307~312:고구려의 미 천왕 8~13)의 난 때 선비족 모용 괴산이 창리의 대가시성을 점거하자 원제는 헤이 주 자사를 모신.구 레이 왕을 불리하게 하는 경우가 종종 요동을 침범했지만(모용)유령은 막을 수 없었다.(스스무 융자 란 선비모용 廆 거창 하짐대가시성 원제님 평양 주 자사 구려 왕을 불리 빈구 요동 廆 불능제)서기 313년(미천왕) 14년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14년 겨울 10월 침락랑군 사로잡기남녀이천여구)기사는 “포로를 취했다” 나오는데 낙랑군을 공격하고 점령하고 쫓아 버리고 버린 것이다.중국에서 316년에 통일 왕조였던 진나라가 멸망하고 5호 16국 시대가 시작되면서 미 천왕이 낙랑을 점령한 313년 서진 말기로 곳 곳의 반란 등으로 중국 왕조가 분주한 시기이다.꾸준히 국력을 회복한 고구려가 이 시기를 이용하고 현도을 공격하는 시안 타이라를 점령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하고 최종적으로 한반도에서 쫓아내시기이다.[『 자치 통감 』권 88하타 모토 10타카 토시 황제 상]···건흥 원년(313년)여름 4월···요동의 긴 통이 낙랑과 대체적인 2군을 점거하고 고구려 왕을 불리하게 공격하고 서로 공격한 것이 해를 이어 끊이지 않았다.낙랑인 왕, 준이 장톤에게 말해서 그 백성 1천 여명을 이끌고 모·용우에에 귀순하자, 모·용우에이 그들 때문에 낙랑군을 설치하고(장)통을 태수다며(왕)쥰을 참군사로 했다.(건흥 원년 여름 네월···요동 내장 통거 낙랑·대방 두 군아타에 고구려의 어머니 룡괴에 귀순, 어머니 룡괴은 료서 지역에 낙랑군을 새로 설치하고 이 료서의 낙랑군은 남북조 시대 북제 때가 되고 최종적으로 소멸한다.(미천왕) 15년 춘설 왕자 사유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15년 봄 정월, 立王子) 서기 314년(미천왕 15년) 가을 9월 남방군을 침략하였다. 남침오가타군(秋九月 남침大方郡)낙랑군을 정복한 이듬해 대방군까지 점령, 추방하였다.서기 315년(미를)16년 봄 2월 현도 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켰지만 죽이고 납치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십육월 공파 현도 성도살 획심의 무리)(미를)16년 가을 8월, 혜성이 동북으로 나타났다.(가을 팔월 별 패우 동북)서기 319년(미를)20년 겨울 12월 진나라 타이라 주 자사 최 비가 도망 온.(이십년 겨울 십이월진평 주 자사 최비 래분)265년 사마염이 조위의 선양을 받고 스스무를 건국하고 316년에 멸망했으나 이듬해 317년에 양쯔 강 남쪽 건업을 수도로서 부흥하고 420년까지 존속하였다.316년 이전 서진, 317~420년간 존속한 남조의 진을 동진로 구분한다.본 기사 319년에는 서진은 무너지고 동진이 존재하던 시기이지만, 평주 자사 최 비?과거 제비가 몰래 고구려와 단 씨, 우몽 씨에게 말하고 함께 모용 밖을 공격했다.(첫 최비 隂說 아급 단 씨·히로시)삼국이 진행되고 극 성을 공격하자 모용 밖이 성문을 닫고 지키고 오로지 우몽 씨에게만 쇠고기와 술을 보내어 대접했다.(삼국 진공 가시 성廆 폐문 자수 독이 소 술호 우문 씨)양국은 우몽 씨가 모용 밖으로 뭔가 내통이 있는지 의심하고 각각 병력을 이끌고 돌아갔다.(아타에국 의우 유모 각 할인 병귀)우몽 씨의 대리인인 실독관이 말했다.(우문 어른 실독관 일)”양국이 비록 돌아갔다고 해도 나 혼자도 있다”(양자 수귀나 당독 취지)모용 외에는 그 아들의 황선홍과 창사의 베우이에 정예 병력을 이끌고 선봉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그에 따랐다.廆사 그 자皝 여지 전 칼끝대병 계지)실독관이 대패하고 자신만 겨우 도망 쳤다.(실독관 대패근이 몸 로멩)최 비가 이것을 듣고 그 형의 아들 최 도로를 하고 극성에 가서 거짓으로 축하했다.(최비 문도 예극 자위가 성사 그 형)모용 밖이 군을 이끌고 맞자 최도가 무서워서 자복했다.(廆림)모용 밖이 바로 최 도를 돌려보내면서 최 비에 말(廆내 씀 도귀위비 일)”항복하는 것이 상책이다, 도망 치는 것이 하책이다”(강하자 상䇿바시리)며 병력을 이끌고 최 도에 따랐다.(머리말 병 수지)최 비는 수십 기의 기병과 함께 집을 버리고 고구려에 진입, 그의 무리는 모두 모용 밖에 항복했다.(비여 수십기기가 래분 그 출중 실강 어廆)모용 밖이 아들 모용인을 요동에 진수시키면 관부와 시장이 예전처럼 평온해졌다.(廆이 그 자인 진 요동 관부시리 안 울타리 여고)호(학위):호쾌하다-병사들에게 음식을 내고 위로하고 대접/내(우치):즉, 바로.스스무 이 요동 지방을 관리하기 위해서 다이라 주를 만들고 그 자체에<제비>라는 인물을 파견(임명) 했으나, 이 제비가<고구려, 단 씨, 소고기 문 씨>라고 은밀하게 연결하여 요동에서 공을 들인 선비족 모용 씨를 공격하려다 실패하자 고구려에 도망 왔다는 내용이다.”단 씨, 우문 씨”도 모용 씨와 같이 선비 족의 일파라 하지만 세력을 이루지는 했지만 정식으로 건국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어쨌든 이 일 이후 선비족 모용 씨가 요동을 장악한 것 같다.고구려 장군인 요노는 하성에 의거하고 있었지만, 모용 밖이 장군의 장톤을 보내고 습격하는 그를 붙잡아 그 무리 1천 여가를 포로로 잡고 극 성으로 돌아갔다.(아장 여노 거우 강 성廆 견장)왕이 빈번하게 병력을 보내고 요동을 침략하고(왕 수견 병구 요동)모용 외에는 모용 한과 모용 인을 보내고구려를 공격했으나(모용 廆견 모용 한·모용인 벌(벌)유키)왕이 화해를 요청하겠다고 모용 한과 모용 인이 돌아갔다.(왕 구 맹세 한·인내환)서기 320년(미를)21년 겨울 12월, 병력을 보내고 요동을 공격했지만 모용인이 막아 싸우고 고구려군이 졌다.(이십일년 겨울 십이월 씀 병구 요동 모용 히토시)전 파지)서기 330년(미를)31년, 후조의 석륵에 사신을 보내고 호시탐탐 선물을 했다.(서른 한해견사 후조 석륵해결 그 楛시)楛화살 : 싸리나무로 만든 화살.후조는 5호 16국 중 하나인데, 고구려가 모용씨(선비족, 연국)를 견제하기 위해 교류하였다고 한다.서기 331년(미를)32년 봄 2월 왕이 숨졌다.(세 십이월왕훙)눈썹 강의 들판에 묻어 버리고 왕호을 눈썹 강 왕으로 정했다.(장례 어羙 카와 노하라, 호왈 미천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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